기도전문월간지 66호 2007년 10월 1일 발행
월간 기 도
Monthly Prayer Journal
주여, 나로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 성경에 나오는 시 “복 있는 사람” ---------시 편 -- 1 (OK) 2 O
* 말씀 묵상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자”-- 야고보서 -- 1 (OK) 3 O
` * 엘리야의 기도 ———————– 김정복 — 2 (OK) 5 O
* 구약에 나타난 기도 (57) —————- 김시남 — 2 (OK) 7 O
* 시편정해 (66) ———————— 최선호– 2 (OK) 9 O
* 새 번역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해설(4) ——- 이종윤 — 3 (OK) 12 O
* 기도칼럼 (15) —-안찰기도(按擦祈禱)——- 김정복 — 1 (OK) 13 O
* 목양칼럼 (25)—-기다렸던 독서의 계절—– 차현회 — 1 (OK) 14 O
* 종놈과 종님 ————————– 심영견 — 1 (OK) 19 O
* 미국 교회의 역사 (21) —————— 이정남 — 2 (OK) 16 O
* 선교가 잘못인가 ———————– 김정복 — 2 (OK) 18 O
* 제2의 한국인가, 아프간인가 ————–옥세철 — 2 (OK) 21 O
* 아프가니스탄 선교 방문기 (1) ————-김정복 — 2 (OK) 23 O
* 뒷장 ————————————- 1 (OK) 24
* 첫 페이지 (사진) —————————– 1 () 1
성경에 나오는 시
(시편84편1-12)
복 있는 사람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말씀묵상
(야고보서3:1-12)
말에 실수가 없는 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엘리야의 기도
김정복 목사 (칼빈성서신학대학(원) 교수)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죽인것을이세벨에게 고하니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왕상19:3)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속한 브엘세바에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 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 호와여 넉넉 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 래 누워 자더 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 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 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19:1-8)
열왕기상18장에서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사백 오십명, 앗세라 선지자400명과 기도로 대결해서 승리하였고, 삼년동안의 가뭄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비를오게한 믿음과 용기와 확신이 있는 기도의사람이었다.
그러나 열왕기상19장에서의 엘리야는 아합왕의 처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니, 이 형편을 보고(왕상19:3) 자기생명을구하기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속한 브엘세바에이르러 자기의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하고 스스로광야로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하고 로뎀나무아래에 누워잠이 든다.
왕상18장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히12:2)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기도를 드렸고,
왕상19장의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이세벨을 보고(왕상19:3) 겁많고 연약한 인간 엘리야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할 때에는 강하고, 담대하고 힘있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으나,
이세벨(현실)을 보고 기도할 때에는 겁많고 연약한 인간적인 기도를 드리게 된다.
왕상18장에서의 엘리야와 왕상19장에서의 엘리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갈멜산상에서의엘리야는 담대하고 강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하나님의사람이었으나,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잠든 엘리야는 힘없고 나약한 인간엘리야의 모습이다.
인간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한분이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의 현실 보다 더 크고 강하게 보임으로 강하고 담대한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 거룩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이세벨(현실)을 볼 때에는 현실(이세벨)이 하나님 보다 더 크고 강하게 보임으로 힘없고 나약하고 겁많은 인간이 되어 도망칠 수밖에 없는것이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늘깨어 현실을 보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여야 한다,(마26:41, 히12:2, 미7:7. 호12:6),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며(딤전4:5),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야 하며(딤전4:7), 성령충만 하도록(엡5:18)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전5:17) 예수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갈멜산의 하나님이나, 로뎀나무에서의 하나님은언제나 동일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엘리야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 갈멜산에서는 불로 역사하셨고, 로뎀나무에서는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며 떡과 물을 먹이시는 온유하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느 때나 우리의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기도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약에 나타나는 기도 (57)
(하박국의 기도, 하박국 3:17-19)
김시남 목사(국제신학대학(원) 교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위에 인용된 글은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의 아름다운 점은 하박국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지 또는 어떠한 물질적인 손실을 겪는다 할찌라도 그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기뻐하겠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점이다. 우리가 하박국서를 읽는다면 선지자 하박국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본래 당시의 부패한 국내외 정세에 관하여 하나님에게 많은 불만을 가졌던 선지자였다. 그의 책 처음부터 그는 불만이 가득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1:2). 이 선지자가 불만에 가득찬 이유는 국내적으로는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며 국제적으로는 강대한 나라가 (바벨론) 약한 나라들을 억누르며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잠잠히 계시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1:13에서도 다음과 같이 불만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그러면 하나님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하박국이 어떻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물질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겠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이번 호에서 하박국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역할, 특히 응답이 지연되는 기도의 유익에 관하여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서 어려운 때는 기도의 응답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이다. 긴급하고 어려운 상항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속히 받든지 아니면 그 상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아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매일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응답이나 신호가 없이 긴 시간이 지난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어떠한 태도를 갖게 될까? 어떠한 사람들은 아마 기도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중단하는 대신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왜 그가 잠잠히 계시는지를 묻게 된다. 하박국이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라고 묻는 배경에는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하여 긴 시간을 기도로 보낸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알기를 요청하고 있다. 다음에 제시하는 예들과 같이 시편에는 하박국과 같이 질문하는 기도들이 많이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 . . 나를 구원하소서” (6:3)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13:1-2)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35:17)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89:46)
위와 같이 질문하는 시편 저자들을 통하여 우리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에 기도에 대하여 장기간 침묵하신 것과 이러한 침묵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박국의 기도로 다시 돌아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가 하박국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불만을 토로하는 태도에서 현실에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하는 태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비록 고통스러운 기도였지만 그의 기도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 결과 때문이었다. 그에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며 하박국 선지자가 현실에 영향받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요구하신다 (2:3-4). 하박국은 그의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보게되며 그가 열국을 심판하실 것을 알게되고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있을 물질적인 어려움을 예상하면서 그러한 상항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응답이 지연되는 기도는 한편으로는 고통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 중에 가장 큰 유익은 우리의 기도의 잘못된 점을 깨닫게 하며 바른 방향으로 기도하게 할 뿐아니라 우리를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응답이 지연되는 기도는 마치 용광로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뜨거운 불을 통하여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금속이 나오는 것과 같이 긴 고통스러운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정리되며 하나님을 더욱 깊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로마서 5:3-4에서 사도 바울은 환난의 유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환난으로부터 소망에 이르는 단계 속에서 기도의 역할이 큰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기도 속에서 인내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며 기도 속에서 연단을 이루게 되며 기도 속에서 소망을 가지게 된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정리되며 성장하게 된다. 오랫동안 응답이 없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은 일이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대하여 잠잠하신지 물어야 하며 동시에 나를 통하여 답변하시는 그의 음성을 통하여 더욱 많은 깨달음과 높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가야할 것이다.
시편정해 (66)
최선호 목사 (메시야교회 담임, 시편정해 저자)
시편 54편
3, 4, 13편과 같이 기도시 중의 한 편이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십 광야 수풀에 숨어 있던 중 그 곳 거민의 밀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때(삼상23:) 지은 시이다.
주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
소재: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곤경.
배경: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십 광야 수풀에 숨어있던 중).
수사: 호격, 반복, 환유, 영탄.
경향: 탄원시(개인적). 비탄적, 기도체.
구성: 4단. 기(1-2절), 승(3절), 전(4-6절), 결(7절).
작자: 다윗(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십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때에).
핵심어: 하나님.
특수어: 마스길(maskil)- 32편 특수어 해설 참조.
낙헌제(樂獻祭: freewill offering)- 화목제의 3가지 형태 중의 하나(레7:1~16)로써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레22:18). 서원한 것을 서원제와 함께 자의(自意)로 예물을 드리는 자원제이었다. 낙헌제의 제물은 소, 양, 염소의 흠없는 수컷으로 화목제나 번제로 드렸고, 그 희생제물이 되는 고기는 이튿날까지 다 먹었다.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살라버려야 했다(레7:16-17).
기(起): 하나님의 구원과 판단 의뢰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1절: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의 공의에 의뢰하며,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2절: 1절의 반복형이다. 그러나 1절에서 일으킨 마음을 3절로 이음매 구실을 하고 있다.
승(承): 자신을 치려는 강포한 불신자
3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3절: “외인”은 히브리어로 ‘자림’인데 이것은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외국의 적들에 대해서 주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그런데 십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다윗과 같은 지파였으므로(수15:24) 외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20 가지 이상의 사본에 ‘자림’ 대신 ‘제뎀’으로 기록된 것을 근거로 ‘교만한 자들’이 바른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 사람들이 다윗을 불의하고 잔인한 핍박자인 사울에게 넘겨주려 한 행위는 외인이나 원수처럼 극악한 행위였기 때문에, 다윗이 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 외인의 행위를 열거하여 하나님께 고한다.
전(轉):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제사 맹세
4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4절: 54편의 주제절이다. 이 어려운 곤경에서 구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나의 돕는 자”는 ‘나를 돕는 자’로 관형격 조사 ‘의’를 목적격 조사 ‘를’로 바꾸어야 좋을 성싶다.
5절: 악인이 받을 보응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있다.
6절: 기도의 응답에 따른 감사를 낙헌제로 드릴 것을 맹세하여 자기의 신앙을 아뢰고 있다.
결(結): 하나님 공의의 성취
7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7절: 하나님 공의의 성취로 기도의 응답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이다.
새 번역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해설(3)
(Lecture on The Lord's prayer and The Apostles' Creed)
이종윤 목사(서울교회 담임)
아래의 새번역 주기도문은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CCK)와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두 연합기간이 주기도문 새 번역 특별위원회를 회원 교단 추천인사로 각각 구성하여 2004년 12월 3일 공식 발표한 것이다.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1)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1) 원문(σου)은 ‘당신의’라는 뜻이다.
2)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Ⅲ. 주기도문의 해석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단순한 기도라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도문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옴’을 청원하고 그리고 그 나라가 옴으로 인해 그와 함께 우리가 얻게 되는 축복들 즉 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과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옴과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 전체를 생각하면서 주기도문을 묵상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을 강조하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지 ‘이런 기도를 하라’ 하시지 않았으므로 주기도문은 우리 기도의 모형이다.
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시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암송하는 의미 이상으로 우리 기도의 모형이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빠(π?τερ)’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 하셨다. 유대인들이 하지 못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들 예 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특권을 주신 것이다.
ⅰ)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이다. 이 아빠라 는 말은 어린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아빠와 똑같은 말이다. 이렇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언약이라 한다. 이와 같은 언약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은 여러 가지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즉 왕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출4:23), 목자와 양, 농부와 포도원, 신랑과 신부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아버지 로 부른 예는 유대문헌에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이다.
ⅱ)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특한(유일한) 아들 되심을 스스로 인식하 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한 것은 제자들(우리)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창조주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뜻이며 그 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부요함을 무슨 근거로 끌어 낼 수 있기에 그런 기도를 하라 하신 것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주신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
ⅲ) 하나님을 아빠라 하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한 것이라면 ‘하늘에 계시는’ 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아빠’는 초월해 계시지만 우리 아빠가 되시는 친근하신 하나님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내재성과 초월성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또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초월(무한)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주보다 작거나 우주 정도시라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가 없다. 우주보다 크고 막강해야 즉 초월해 계셔야 우주를 다스릴 수 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내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개념은 만민의 아버지 개념과는 다르다. 하나 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는 아니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하신 아버지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성령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연합된 이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이 세상엔 하나님의 자녀 가 있고 마귀의 자식들도 있다.(요8:44)
ⅳ) 구약에서 ‘아빠’라고 부르는 아들의 언어는 언약의 언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먼저 강조하고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순종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빠이기 때문에 자녀들의 필요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언부언 기도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 곧 하 나님 나라의 오심을 구하면 된다.
ⅴ) 탕자의 비유를 당시 유대교 사상에 비교해보면 새로운 면이 있다. 아 들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끝까지 신실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끝까지 아버지 노릇해 주심을(사43:1-7)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의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항상 아들에 대한 자비로 나타난다. 그 자비가 아들에게 회개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자비가 회개에 앞서고 따 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빠 노릇해 주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수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눅12:32) 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창조하고 모으는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 의도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문 첫마디가 아빠가 된 것이다. 주기도문 첫 마디인 아빠는 하나님께 대한 가 장 기본적인 신뢰를 표현한 말로써 그 아빠 다음에 나오는 모든 청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번역상의 문제〉
ⅵ)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호격이므로 ‘아버지여’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아버지와의 친밀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를 붙이지 않는 번역이 좋다. 우리말 어법은 호격의 ‘~여’ 또는 ‘~아’등은 대체로 낮춤의 대상에게 쓰인다. 예컨대 ‘복동아’ ‘학생들이여’는 가능하지만 ‘선생님이여’, ‘사장님이시여’는 어색하다. 본문의 바른 번역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된다.
소위 몇몇 여성신학자들이 양성평등원칙이라는 이유로 주기도문 번역에서 아버지를 삭제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으로만 하였다. 여기서 아버지는 인간의 성(性)을 말하는 남성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하신 적도 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눅15:8-10)와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의 비유(눅13:20-21)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두 여인에게 투사하셨다. 하나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남성과 여성의 은유로 다 표현하시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189회나 사용하셨다.
ⅶ) 하나님은 나의 아빠신가? 그렇다면 유년시절 나를 도우셨을 것이다. 영적으로 걷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넘어질 때 붙잡아 주시고 내 걸음을 인도해 주셨다.(호11:3-8) 하나님은 내 일생동안 나를 돌보실 것이다. 나의 날에 풍성히 복을 주실 것이다.(고후12:14) 나는 그에게 영원히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나에 관한 그리스도의 목적과 충돌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기도칼럼 15
안찰기도 (按擦祈禱)
김정복 목사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 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 에서 치리이다 (열왕기하13:14-17)
“안찰기도”곧“때리는 기도”는 성경에 없는 기도이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안찰이란 말은 열왕기하13:16에만 있는데. 이곳에 기록된 “안찰”은 선지자 엘리사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Joash)의 활 잡은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올려놓았다는 말이지 왕의 손을 때렸다는 말이 아니다
영어성경(NIV) 에는 더욱 분명하게 표현되어있다.
한글 개역성경 :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按擦)하고
영어성경(NIV) : Elisha put his hands on the king’s hands.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손으로 왕의손 을안찰하고 (왕하13:16)
“Take the bow in your hands,” he said to the king of Israel. When he had taken it, Elisha put his hands on the king’s hands. (2 Kungs13:16)
이곳 이외에는 신구약 성경 어느 곳에도 “안찰”이란 말이 없다. 더욱이 “안찰기도” 란 말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안찰기도는 성경에 없는 기도이다. 또한 안수기도나, 안찰기도라 하면서 때리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기도는 모두 성경적 기도가 아니다.
항간에 안찰기도라고 하면서, 귀신을 쫓아낸다, 병을 고친다고 손으로 또는 다른 도구로 사람을 때리며 기도하는 예가 있는데 이는 모두가 잘못된 기도이며, 성경에 없는 비 성경적 기도이다.
목양칼럼 (25)
기다렸던 독서의 계절
차현회 목사(웨슬리세계선교회 회장)
독서(讀書)를 통한 많은 풍요로움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 마치 탈진한 상태에서 충정(忠情)으로의 축복을 비롯, 대화나 도전은 뜨겁고도 선명(鮮明)으로 이르게 될것이 분명하다. 톡서를 통한 만남과 사귐 그리고 나눔들은 영적으로나 지적(知的)으로도 성장은 물론, 깨달음과 기쁨과 지혜와 그리고 판단력이 생산되기에 더 더욱 보람과 풍족감이 넘치게 된다. 참 인생의 보람과 즐거움이 어디서 오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벽부터 봉독(奉讀) 또 봉독하기에 경건(敬虔)함과 강건(强健)함이 샘솟듯 일어나니 말이다. 뿐만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야 말로 더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말씀, 기도, 찬송 그리고 소망에 넘치는 새로운 믿음의 결단들은 시대적인 사명들을 감당토록 거룩한 버팀목이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지식에만 멐추게 하는 양서(良書)를 읽는 것에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 생명력을 일으키고, 사명을 강건하게 담당하게 하는 필독(必讀) 성서(聖書)야 말로 기다렸던 독서의 계절을 통해 지식의 풍요를 넘어 가장 고귀한 성역(聖域)을 충실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이 있는 결실이 하나 하나 맺어지기를 간청하며 기도드린다. (성서주일(聖書主日)을 대비하여)
???????????????????????????종님과 종놈
심영견 목사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교수)
말(word)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라 많이 변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dulos)은 그야말로 노예(slave)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노예라도 그냥 노예가 아니라 묶여있는 노예(bond slave)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둔갑을 해서 교회사회에서는 이 노예가 노예님이 되어버렸다. 그 예로 우리 입에 “종님”이 얼마나 익숙한가? 사실은 종님이라기 보다는 종놈이 억양상 훨씬 잘 어울릴 법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종에게 님자를 안부치고 “김 목사!” 라고 할라치면 버릇없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종님이라고 깍듯이 불러야 교양으로 간주된다. 어쩌다가 이렇게 까지 된 것인가? 그 원인으로 첫째, 성경번역자들의 실수이고 둘째, 성경원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한 교역자들이고 세째, 그냥 따라만 가는 교인들 때문이다. Kittel은 우선 흠정역(KJV)을 나무라고 있다. 바울이 편지 서두에 극구 자기는 노예라고 하고 있는데도 번역은 섬기는 자(servant)로 번역을 해서 종의 이미지를 버려놓았다. 얼마나 바른대로 번역하기에 인색했던지 신약성경에 130번이나 노예로 되어 있는 것을 노예라고 번역한 곳은 1회밖에 뿐이다. 그러나 새 표준미국번약(NASV)성경에서는 원문 그대로 노예(slave)라고 번역을 하였다. 우리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주의 종”이라고 해도 우리의 의식속에서는 높으신 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다가 “님”자를 붙여주니 이게 우리의 신앙유지에 목사당사자에게도 그리고 그렇게 불르는 교인들에게도 해를 끼친다. 차라리 타락해버린 “종”이라는 말을 없애고 바른 뜻을 가지고 있는 “노예”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목사들의 사표인 바울이 자신을 노예라고 칭했다면 그 뜻을 살려 “김 노예께서 오늘 성경봉독하시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은혜가 될것이며 인식 회복에도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사람들의 인식을 오도하고 있는 님자 호칭이라도 빼서 옛날 주인의 소유로 종문서에 기재되어 있었던 본래의 종의 개념을 되살리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법이리라. 차리리 노예라고 불른다면 종의 원리대로 1) 소유권이 없고(오늘 날 많은 이권개입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2) 주인을 위해서만 준비되어 있음으로 자유가 없고(너무 목사 임의로 하는 폐단), 3) 주인의 선처만 바라고(주인의 보호와 공급만 바라니 간절해지고) 4) 주인의 결정에 의해 상급과 벌이 내려지니(겸손해진다) 오늘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성경대로 단순하게 사는 거룩한 목사가 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미국교회의 역사 (21)
이 정남 목사 (본지 편집위원)
독립에 미친 성직자들의 영향
“지방의 크리스천들은 전부 독립운동가들이고 정치가들이며 성경 지식은 놀라울 정도이다” 한 영국관리의 고백이다. 이는 바로 성직자들의 역할이었다. 물론 정치적인 현실은 마을 회의를 통해서 깨달았지만 이론적인 측면은 주일 아침 설교, 자주 열리는 강연 그리고 교회 직원들을 선출할 때 가지는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현실에 접근하였다. 지방의 주민들은 도시 지식인들에 떨어지지 않은 지식과 독립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New England 지역 주민들은 정치적 사회적인 움직임과 변화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문맹률이 높고 언론 출판물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지방 주민들은 시사적인 잇슈는 성직자를 통하여 알게되었다. 물론 성직자들은 정치 사회적인 면만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기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등등을 외쳤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은 식민지의 권리는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 의롭거나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는 우리의 노력을 하나님은 도울 것이라는 식의 목사들의 설교는 없었다.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의 역사적인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책임을 수반하는 계약 [covenant]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의 원인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찾아야한다는 진리를 알고있었다. 결국 우리의 고난은 영국의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민지 주민의 죄악으로부터 온 것이며 주민들의 비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부터 회개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신앙 고백은 칼빈의 정치 사상, 영국 청교도 사상 그리고 스콧트랜드 장로교 사상 전통에 따른 것으로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및 개혁주의 사상의 정치 사상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John Locke의 Political Calvinism의 사상이기도 하다.
특히 장로교회와 침례교회는 식민지 일부 지역에서 회중교회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다. 특히 New England 지역의 침례교회는 회중교회로부터 차별을 받았으며 침례교회는 회중교회는 저들의 신앙고백과 전통을 파괴하였고 침례교회가 New England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Virginia 지역에서는 침례교회와 장로교회는 영국교회의 계속적인 억압에 반항하고 있었다. 반면 장로교회 중에서 스콧트랜드와 아일랜드계 교인들은 지난 날 자신들의 고향인 북부 아일랜드에서 영국 장로교회로부터 받았던 차별을 기억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부터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역사의 흐름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식민지 초기의 경건한 청교도 신앙과 계속된 신앙 각성 운동의 결과 주민들은 계속 회개와 신앙 각성 그리고 개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순종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은 순종과 회개를 계속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신대룩 (미국)의 신앙정신은 무엇인가?
성직자들과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우리들에게 고난과 재난이 임하게 된 원인은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서 찾아야한다고 믿었다. 결국 전쟁을 해야하는 원인은 영국 정책의 결과가 낳은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는데 필요한 지혜와 힘 그리고 능력을 주실 것이다 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또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신앙적으로 다양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여 주민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물론 전쟁에 임박하여 각 교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명제 앞에 서로 조회하며 협력의 정신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이미 대각성 운동에서 시작 교단적 (신앙적)인 차이는 무너지고 있었고 식민지 지역간의 차이도 신앙적인 차이와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개신교 교단들은 협력하여 영국교회의 영향을 저항하였다.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위한 운동은 식민지 주민 (미국인)은 누구인가 하는 동질성의 문제까지 추구하기 시작하게 된다. 개신교 주민들은 광대한 신세계에서 신앙의 자유와 함께 안전을 얻은 미국인의 정신은 (adventure) 무엇인가 하는 질문, 즉 신세계의 동질성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Cotton Mather 목사는 이런 질문에 정의를 내렸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느냐 [What went ye into the wilderness to see?]는 제목의 설교였다. ” 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막 1: 3)이었다. 신대륙의 독립은 “언덕 위의 집”, 실제로 이 당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Cotton Mather 목사는 이미 크리스찬들의 신앙이 전과 갖지 않고 해이해진 것을 걱정하면서 교회는 성직자들이 가정 생활을 염려하지 않도록 경제적인 책임져야 한다고 경고하기도하였었다.
참고도서
Winthrop Hudson: Religion in America
Robert Handy: A Christian America
Leland Hine: An Outline of Church History
Kenneth Davis: Don’t Know Much About History
William Sweet: 미국교회사
The Story of Religion in America 번역판
크리스찬 헤릴드: 기독교 100대 이벤트
박형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선교가 잘못인가?
김정복 목사 (본지 발행인겸 편집인)
이번 한국 분당에 있는 샘물교회의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팀은 :
1) 모두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비자를 받고 입국했습니다
2) 아프가니탄 정부는 현재 자유 민주 국가입니다.
3) 칸다할 지역은 수도 카불에서 차로 약 8시간 거리에 있는 탈레반 오지입니다
4) 이들이 오지 칸다할까지 봉사하러 가다가 탈레반 공비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5) 이들의 방문 목적은 칸다할 지역의 병원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환자들을 돕기 위한 순수한 기독교적 사랑과 희생과 봉사입니다
6) 이곳은 외국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 서툴고 무엇보다 언어가 안통해서 어려움을 당한 줄 압니다.
7) 그런데 왜 이들에게 돌을 던집니까? 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기독교 선교의 원칙은 교과서 같고, 원론적인 것 같지만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장기선교든 단기선교든 선교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22:37-39)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심도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3:16)
타락하고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하늘나라의 선교사로 이 땅에 보내셨으며 예수께서는 빛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이 세상에서 피흘려 순교하셨고 그 피 값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히9:22) 따라서 선교(宣敎)와 순교(殉敎)의 어원은 같은 것입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두 사람의 순교자들과 21명의 피납자들의 고통을 보면서 많은 기도와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다르며 한번도 만난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을 위하여 예수의 사랑으로 봉사와 희생을 하러간 저들을 납치하여 고통을 주고 살해한 탈레반과 또한 우리의 사랑하는 고통당하는 자녀들을 생각합니다.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의미한 일은 허락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신 줄 압니다. 과연 피랍되었던 21명이 돌아오자 많은 반응이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비기독교, 불신자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욕설과 비난으로 대응해 옵니다. 일부에서는 돌아온 피납자들을 환영은 못할망정 계란을 던지겠다고 까지 합니다.
2) 일부 기독교 목사들 100여명(권위 주의시대에 인권, 통일운동을 했던 진보진영의 원로 목사들)은 경제 우월주의, 문화 우월주의를 전제하는 19세기 제국주의적인 복음전도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며 공격적 선교, 전투적 선교를 회개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국일보 2007.9.5. C11 기사)
차제에 한국교회의 선교사역과 현지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사역을 생각해 봅시다.
물론 모든 교회와 모든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인구 3억이 넘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장기 선교사 15000명 이상을 세계 각국 선교지에 파송했으며, 세계 방방곡곡 오지에도 한국 선교사가 나가 있지 않는 곳이 거의 없는 선교대국으로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습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교지에 얼마나 많이 가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1986년부터 금년(2007년) 까지 21년 동안 계속해서 아프리카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까지 약 40여개국을 매년 순회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1)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하나님이십니다
2) 선교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이 아닌 성령의 열매(사랑,희락,화평, 오래참은,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3) 선교의 이유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9-20)
(2)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3)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16:15)
(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이번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팀의 피납 사태를 계기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선교사역을 반성하고,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선교활동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장기선교나 단기 선교사역의 일부가 잘못되었다고 선교를 중지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선교는 편한나라, 오라고 하는나라, 안전한 나라에서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고, 힘든나라, 안전하지 못한나라,
오지 말라고 하는나라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11사도 중에 순교하지 않은 사도가 누구이며 초대교회 당시 핍박을 받지 않은 성도가 누구 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순교)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한국에도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프간에서 돌아온 단기 선교팀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롬14:7-8)
제2의?한국인가,?아프간인가
옥세철 (한국일보 논설위원)
스물 세 명이 떠났다. 그 중 두 사람을 잃었지만 마지막 열아홉 명은 무사히 돌아왔다. 봉사의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었다. 그 얼굴이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다수 한국민의 시선은 그다지 고와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잘못해 걱정을 끼쳤으니 입 다물고 있어라’는 질책이라도 퍼붓는 것 같이. 그리고 계속 쏟아지는 건 교회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다. 물량주의에, 확장주의에, 실적주의에 절어 있다. 선교도 그런 측면으로 본다. 그 질책이 여간 거센 게 아니다. 피로감이 들 정도다. 아프간 피랍사태는 그러면 결국 그렇게 해서 일단락 지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새삼 ‘한류’(韓流)란 단어가 떠올려진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출발됐다. 그게 전 세계로 퍼진다. 한류란, 말하자면, 한국을 진원지로 하는 일종의 세계화 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번 사태는 어쩌면 ‘영적 한류’ 현상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왜 한류가 유행인가. 한국인들이 누리는 자유·물질적 풍요·다원주의·개방성, 그리고 서구화. 이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삶의 질, 가치관들이 은연중에 녹아 독특한 맛에, 멋에 또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 한국의 대중 예술에 세계인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유와 개방성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전 세계 170개국에 퍼져나가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그 증거다. 교회도 그렇다.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로 나간다.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순수한 봉사정신에서, 또 고통 받는 자를 돕기 위해서다. 한국이 누리는 자유와 개방성, 거기에 이 같은 봉사와 희생정신이라는 가치관이 더해질 때 ‘영적 한류’ 현상이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아프간 피랍사태와 관련해 외국 언론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국민의 30%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그 한국이 미국 다음의 세계 2위 선교국이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이 사실에 새삼 경이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프간 피랍사태에서 무엇을 보나. 곧 다가올 대지진이다’-. 아시아 타임스의 지적이다. 역시 놀라움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를 곧 닥칠 영적 대지진의 그 첫 번째 진동으로 파악하고 있다.이 신문이 피랍사태와 관련해 새삼 눈을 돌린 건 중국, 더 나아가 아시아의 기독교화 가능성이다. 하루 평균 1만명의 기독교인이 탄생한다. 그 결과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1억을 넘어서면서 공산당원 수를 앞질렀다. 그 숫자가 2050년께는 2억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다.아시아 전체로 눈을 돌릴 때에도 비슷한 흐름이 발견된다. 기독교는 때문에 백인에, 유럽 중심이 아닌, 아시아 중심의 종교가 되고, 그 선구역할을 하고 있는 게 한국이라는 설명이다. 그 중국 기독교들이 점차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캠페인이다. 복음을 들고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타겟은 이슬람권이다. 그럴 때 세계는 거대한 영적 대지진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아프간 피랍사태를 그 대지진의 서곡으로 본 것이다.제2의 한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것인가.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지가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중국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선교활동을 다루었다. 결론은 ‘중국이 제2의 한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 인구의 25%에서 50%가 기독교도가 된 한국은 민주화와 법치에 성공했다. 2050년께 중국 인구의 20%가 기독교도가 된다. 그럴 때 중국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모델로 한국을 제시했다. 중국의 장래희망을 한국에서 본 것이다. 그 변화를 일부는 세계사적인 변화가 될 것으로 본다. 과거 로마제국 붕괴 후 전 유럽이 기독교화 된 것과 방불할 정도로. 아프간 피랍사태에서 무엇을 보나.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생명력의 본질이다. 한국내 작가의 말이다. 왜 젊은이들은 고통의 땅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나. 타인을 향한 선의와 봉사정신에서다. 그 힘이야말로 인류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생명력의 본질이다. 그게 실행방법의 문제점으로 가려졌을 뿐이라는 것이다.아무도 타인을 위한 희생에 나서지 않을 때 그 사회는 죽은 자들의 사회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는 희망이 있고, 오히려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부연의 설명이다. 아프간 피랍사태가 남긴 진정한 교훈은 무엇일까.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 같다. sechok@koreatimes.com
아프가니스탄 선교 방문기 (1)
김정복 목사
2007년 여름 한국 분당 샘물교회 단기선교 봉사팀의 아프간 피랍사태로 인하여 아프간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것 같아서 2002년10월20일-29일까지 약10일간 아프간 마쟈리샤리프, 셰발간, 카불 등지를 선교 방문한바 있는 필자가 보고온 아프간을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02년10월20일부터29일까지 약10일간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왔다. 아프가니스탄하면 탈레반정권,알카에다,오사마빈라덴, 모슬렘 극단주의자들,테러분자들, 마약재배, 전쟁과페허, 난민들 이러한 모습들이머리에 떠오르는나라이다. 그러나막상우즈베키스탄과 아프기니스탄을 연결하고있는국경철교(鐵橋)는 우즈베키스탄의 젊은 병사들이 띠엄 띠엄 서 있을 뿐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우리일행은 이국경철교를걸어서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강건너 우즈베키스탄쪽은 푸른잔디와 나무들이 무성하였으나 아프가니스탄쪽은전쟁을치른땅이라그런지풀한포기없는누런황토와 황무지만을 보여주고 있었다.우즈베키스탄 국경을넘어 아프가니스탄 땅으로들어서니 군인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처음보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수비대였다. 군인들의 복장과 자세를 보니 당장 정규 군인들이 아닌 민병대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입고있는 군복은 일정하지가 않고 여러 가지 군복들이섞여있었고, 이들이 들고있는무기는 쏘련제를들고있었으나 하나같이 훈련받은 정규 군인들의모습은찾아 볼 수가 없었다.
우리가도착하니 수비대장이 우리일행중 한 사람을 알아보고 환영을 한다. 그리고 우리 일행중에 의사가 없느냐고 묻는다 마침 미국에서온 의사 한분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대단히 반가워하면서 자기가 이번탈레반정부와 싸울때에 부상을당했다고 하면서 몸의상처를보여준다. 갑자기 수비대검문소가 진료소로 바뀐 듯했다. 의사가진찰한후에, 돌아올때에 약을주겠다고하니 옆에 있던 군인들이 모두 너도나도 아프다고 약을 달라고 한다. 아프간 국경수비대의 진면목의 일부를 보는듯했다. 전쟁과 질병 과 굶주림 그리고 이슬람 종교에 지친 영혼들의 고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국경 수비대를 통과하니, 바로 옆방에서 외무부에서 파견된직원한사람이 입국심사차 우리를기다리고 있었다. 외무부 파견직원은 이미 우리 중에 한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인사를나누는동안에 입국심사는이미다끝났다. 미국에서가져간 초코렛 한봉지를주며,수고하였다고 자녀들에게 주라고 하였더니 몹시 감격해 한다.
일행은 검문소와 외무부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고 아프가니스탄 내지(內地)로 발을디뎠다. 감격스러운순간이었다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기도를드렸다 생소한 언어(다리어), 생소한 얼굴, 그리고 생소한 복장이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일정하다. 남자들은 대부분 흰색 자루 같은 통으로 된 옷을위로부터 아래까지 뒤집어쓰고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모자들을 쓰고있었으며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곳 아프가니스탄은 99%가 이슬람신도들임으로남자들은 모두 일정한 이슬람 제복 같은 흰색자루 같은 통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시내에서 많이 볼 수 없었으며, 거리에 나온 여인들은 대부분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몸을 흰색 또는 푸른색의 브루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4 넌여 동안이지만 탈레반 정권시대에서는 여자들은 몸을 외부에 노출시키면 처형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여자들은 온 몸을 브루카로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눈도 그물로 된 부분으로 밖을 내어다 보아야 함으로 잘 보이지가 않아 사고의 위험이 높다고 한다. 또한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여 학교에 갈 수가 없었으며, 여자 환자들은 남자의사에게 진찰도 받지 못하게 함으로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철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경전에 따른 통치로 여성들의 희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탈레반 정권이 붕괴 된지 1 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거리에서 여인들의 얼굴은 보기 힘들다 성인 여인들은 모두 브루카를 쓰고 있었고 어린아이들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마중나온 미국 모교회에서 평신도 사역자로 파송된 형제 한 분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는 현지인과 똑같은 복장(위로부터 아래로 자루 모양으로 통으로 된 모슬렘 평상복)을 입고 있어서 처음에는 현지인과 도저히 구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에 마중나온 차를타고 국경을 출발하니 어느덧 모래사막에 이른다. 아무리 달려도 끝없는 모래벌판으로 이루어진 언덕과 사막, 모래사막 사이로 오솔길 같이 펼쳐진 도로, 이 도로로 우리가 탄 차가 달리고 있다. 이 도로는 바람이 불면 언제 모래 산으로 덮여질지 모른다고 한다. 이곳 저곳의 길옆에 삽과 굉이를 든 사람들이 여러 명 떼를 지어 서있다. 바람으로 도로에 모래가 쌓이게 되면 즉시 모래를 제거하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사진)